"헨, 아니, 리더 봤어요?"
샌드위치를 먹으려고 입을 벌리던 레지널드가 그대로 멈춰 섰다. 엘리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계속 찾고 있는데 안보여서요."
"집무실에 없던가?"
오른팔맨이 들고 있던 머그잔을 내려놓으며 되물었다. 기계음이 섞여 어설픈 한숨 소리가 듣기 좋진 않았다.
엘리는 들고 있던 리볼버 탄창에 천천히 총알을 밀어 넣었다.
"거긴 진작에 확인했죠. 꼭 이럴 때 없어진다니깐."
"의무실은 가봤나?"
"가봤죠."
"금고는?"
"거기도요. 여기가 마지막으로 와 본 곳이에요."
그녀는 쯧, 하고 혀를 차더니 곧 총알을 모두 넣은 몸체를 이리저리 돌려보고 있었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아무래도 금방 일을 칠 것만 같았다.
레지널드는 탐탁잖은 표정으로 샌드위치를 내려놓곤 의자 끄는 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따라오게. 내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으니 그 총은 좀 내려놓고. 이거 참, 첫 끼인데 말이지."
"아녜요. 레지널드씨가 굳이 같이 가주실 필욘 없어요. 그렇지 않아도 오늘 피곤하실 텐데. 위치만 알려주세요."
"그러면 그 총은 여기 놓고 가고."
"그건 좀."
"그럼 그냥 따라오게."
"네에,"
엘리는 여전히 리볼버를 손에 쥔 채, 졌다는 듯 양손을 들어 보이더니 그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오른팔맨 또한 아무 말 없이 당연하다는 듯 그들의 뒤를 따랐다.
레지널드는 자신의 시선 너머를 흘끗 보더니 수심이 가득 찬 얼굴로 중얼거렸다.
왜 저렇게 고집들이 센 건지.
그들이 도착한 곳은 방금까지 있던 식당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사람이 거의 지나다니지 않는, 소름 끼치도록 적막한 복도에서 헨리는 커다랗고 동그란 창가에 기대앉은 채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속이 끓어오른 엘리는 성큼 다가가 헨리의 머리에 총구를 들이밀었다. 레지널드는 놀라 나무라듯 그녀의 이름을 크게 소리쳤지만, 정작 천천히 눈을 뜬 헨리는 놀란 기색도 없이 나른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뭐해?"
"너야말로."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레지널드가 이번엔 도와주겠다고 했는데."
"레지널드씨가 보기에도 내가 너 찾는다고 한참 돈 게 안쓰러워 보였나 보지."
헨리가 엘리 너머에 있는 레지널드에게로 시선을 던지자 오른팔맨이 그의 앞에 섰다.
그 모습을 본 헨리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고 일어섰다. 손가락으로 총을 든 엘리의 손을 툭 치자 쉽게 밀려났다.
"너도 쟤처럼 날 지켜야지. 왜 총이나 들이밀고 있어."
"지킬 기회나 주고 말해."
엘리도 이유 없이 이러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늘 헨리가 실행에 옮긴 계획은 너무나도 무모하고 위험했다. 지구로 내려가 군인들이 득실득실한 곳에 잠입해 압수된 튀니지 다이아몬드를 회수해 오겠다는 것이었다. 엘리는 그런 계획에 찬성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미 헨리가 결정을 내린 사안이니 그녀가 끼어들 수 있는 여지는 없었다. 오직 헨리의 결정을 믿고 따르는 것이 그녀의 역할 아니던가. 물론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에 골이 아파지긴 했지만 여차하면 자신이 헨리 대신 위험에 뛰어들어 죽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넘겼다.
하지만 상세한 계획이 적혀있는 서류 뭉치 속에 대신 죽을 그녀의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다. 엘리는 극도의 불안감을 느꼈다. 제아무리 말을 잘 듣는 개더라도, 주인이 홀로 불 속으로 뛰어드는 데 옷소매 하나 물어뜯지 않을 수는 없지 않은가. 결국 엘리는 곧장 헨리에게 재고를 요청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그녀가 따라올 수도 없도록 서류에 표시된 시간보다 훨씬 이른 시각에 계획을 실행했다. 오직 레지널드만 데리고.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그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린 게 몇 시간, 역시 자신도 가봐야겠다는 생각에 채비하고 있자니 오른팔맨이 엘리를 불러세웠다. 레지널드가 어디 있는지 보았냐는 답지 않게 당황한 표정과 함께.
레지널드씨는 아예 말 조차 꺼내지 않은 건가. 어처구니없는 그들의 행보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엘리가 오른팔맨에게 자신이 들은 계획을 설명해주고 함께 지구로 내려가자고 제안하려던 찰나, 창문 너머에서 조직원을 우주선으로 귀환시키는 레이지가 보였다. 헨리와 레지널드가 돌아왔단 의미였다.
허겁지겁 귀환장에 달려가 보자 조직원들이 만세의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엉망진창이 된 채 다이아몬드를 겨우 껴안은 레지널드가 보였다. 오른팔맨은 조직원들을 무르고 레지널드를 부축했지만, 엘리는 움직이지도 못한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헨리가 없다.
극단적인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자 엘리의 얼굴이 급속도로 굳어갔다.
그런 엘리를 본 레지널드는 부축을 받다 말고 재빠르게 말했다. 계획은 성공했고 헨리도 무사하니 안심하라고. 우주선에 도착하자마자 '혼자 쉴 거니까 따라오지 마.'라고 하며 어디론가 가버려서 여기 없는 거라고.
엉뚱한 오해를 하고 있던 엘리는 그제야 얼굴빛이 돌아온 채 수고했다는 한마디만 급히 던지고 헨리를 찾아 뛰쳐나갔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찾은 헨리는 굳이 찾기 어려운 곳에서 청승을 떨고 있었다. 그냥 조용히 쉬고 있었겠거니, 생각하며 넘길 수도 있겠지만 헨리를 잘 아는 엘리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는 표정을 잔뜩 구기곤 그의 겉옷을 걷어 젖혔다. 검은 코트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것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허리춤에서부터 낭자한 피는 새하얀 셔츠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헨리는 자신의 옷을 한번 보고, 엘리의 얼굴도 한번 보더니 살짝 당황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피 아니야."
"퍽도?"
엘리가 짜증을 내며 거칠게 코트를 놓았다.
"이래서야 쏠 맛도 안 나겠네."
"멀쩡하면 쏠 생각이었어?"
"답답한 너 쏴버리고 내가 새 리더나 될까 싶었거든."
"네가 그럴 리가. 너만큼 내게 충직한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능청스러운 꼴이 퍽 얄미웠다.
엘리는 헨리를 흘겨보더니 허리춤의 홀스터에 리볼버를 집어넣었다.
"그걸 걸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작전에 날 두고 가서 이 꼴을 당하고 와?"
"말했잖아. 너무 위험했다고."
"그렇다면 날 더 데려갔어야지."
"아니. 네가 자꾸 그러면 더 데려갈 수가 없어."
엘리의 얼굴에 '그게 뭔 개소리야' 싶은 표정이 떠오르자, 헨리는 아직도 오른팔맨의 경계를 받으며 서 있는 레지널드에게 시선을 던졌다.
"레지널드, 넌 이해하지?"
레지널드는 괜히 자신을 끼워파는 헨리가 원망스러운지 우주선이 가라앉을 것처럼 한숨을 쉬었다. 그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오른팔맨의 팔을 괜찮다는 듯 살짝 밀어 치우곤 앞으로 나섰다.
"그래."
그리곤 오른팔맨을 살짝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자네들은 너무 충직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최측근이 충직한 게 뭐가 문제라고…."
"난 말 잘 듣는 개가 필요한 거지 대신 죽어줄 사람이 필요한 게 아니야."
헨리가 끼어들었다. 놀란 엘리가 헨리를 쳐다보았지만 그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마냥 아무렇지도 않은 능청스러운 얼굴이었다.
"주인이 앉아있으라고 명령했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자리에 끝까지 앉아있는 존재가 필요하다고. 설령 네가 죽더라도, 그리고 내가 죽더라도."
엘리는 일그러진 얼굴로 헨리를 바라보기만 하더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이내 고개를 숙였다. 오른팔맨은 묘하게 찡그린 얼굴로 헨리를 쳐다보았다.
"이제 내가 널 왜 놓고 갔는지 알겠어? 너는 내게 너무나도 충성스러워. 내가 위험에 처한다면 내가 맡긴 일도 내팽개치고 달려오겠지. 뭣하면 대신 죽기라도 하려고."
"내가… 그러지 않으면 네가 죽잖아."
"네가 나 대신 죽어주면 내가 좋아할 것 같아? '내'가 내린 명령을 무시하면서 죽기까지 했는데?"
여전히 비정상적일 정도로 평탄한 어조였다. 엘리의 낯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레지널드가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는 헨리와 엘리에게 가까이 가더니 어르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
"그만하게, 헨리. 그런 의도도 아니면서 왜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야?"
레지널드는 고개를 푹 숙인 엘리의 어깨를 잡아 돌리더니 오른팔맨에게 데려가라는 듯 눈치를 주었다.
하지만 오른팔맨이 엘리에게 다가와도, 엘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 얼굴을 손바닥으로 비비며 거칠게 마른세수를 하더니, 다시 휙 돌아 헨리를 보았다.
"그럼 오래 살아!"
잔뜩 성이 난 목소리였다.
눈썹을 찡그린 헨리가 엘리를 보자 그녀는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모진 말에 꽤 상처 입었을만 한데도 여전히 굳센 얼굴이었다.
"내가 죽을 필요 없게 오래 살라고, 리더."
순간, 떨리는 손을 그러쥐는 것이 헨리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무어라 말하려 입을 열더니 잠시 멈칫하며 미간을 잡았다.
"너 끝까지…."
헨리가 깊게 한숨을 내쉬고 있자 엘리는 한 발짝 다가와 굴하지 않고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은 우선 얌전히 의무실 가."
"아니… 아, 뭐 이런 거 가지고 그래! 간단한 응급처치는 거기서 하고 왔다고. 너 이럴 것 같아서 일부로 피해 다닌 건데 어떻게 알아서는…."
헨리는 다시 한번 레지널드를 흘겨보았다. 레지널드는 콧수염을 한번 잡아당기더니 헨리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말했다.
"더 늦었으면 엘리가 자네를 보자마자 정말로 총부터 갈겼을 텐데? 난 자네를 살려준 거야."
"그래. 뭐 잘했다고 레지널드씨를 째려봐!"
헨리의 투정을 부리는 듯한 말에 방금까지의 위험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 평소의 천방지축 리더와 성질 난 최측근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둘은 그렇게 그 자리에 서 한참 더 투덕거리더니 결국 등짝을 치기 시작하는 엘리의 등쌀에 못 이겨 의무실로 향했다. 레지널드는 레드카펫에 입장하는 배우마냥 여유롭게 손을 흔들고 떠난 헨리를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하여튼 특이하다니까."
"그런데 레지, 오늘은 좀 이상하군요. 저를 놓고 단독으로 행동하신 것도 모자라서 웬일로 헨리에게 비밀을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하신 겁니까? 결론적으론 비밀을 깨긴 했지만, 그래도 항상 사적으로는 도와주려고 하지도 않으셨잖습니까."
레지널드는 오른편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이내 시선을 돌렸다.
"나와 같은 실수는 하지 않길 바랬거든."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곤 오른팔맨의 기계팔을 다독이듯 툭툭 치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나도 똑같은 실수를 다시 하고 싶진 않았었네. 이제라도 바로 잡을까 싶었는데…."
레지널드의 머릿속에 방금 전 상황이 스쳐 지나갔다. 오른팔맨의 후배가 자신의 후배에게 '오래 살라'고 애원하던 순간이. 그때의 오른팔맨은, 그녀의 뒤에서 같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네들 고집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군. 아무래도 오늘은 우리가 진 모양이야."
오른팔맨이 알 수 없다는 듯 조용히 그를 바라보기만 하자 레지널드는 앞장서 걸으며 말했다.
"이제 끝난 얘기지. 가자, 아무래도 아까 못 먹은 샌드위치가 아른거리네."
"네."
의문이 남았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 오른팔맨은 레지널드의 뒤에서 조용히 걸음을 맞추며 식당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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